옹진호 사건
최근 수정 시각: (5년 전)
1. 개요 [편집]
2. 사건 배경 [편집]
3. 사건 경과 [편집]
사건 당일에 해병대원 50명이 휴가를 나갈 상황이었다. 옹진호의 승선 정원은 300명이었는데, 민간인 200명과 해병대원 50명이 부두에서 대기 중이었다. 당시 부두에 있던 해병대원 중 최선임은 나중에 해병대사령관을 지낸 전도봉 대위였다.[1] 배에 타지 못 할 경우 1주일 뒤에나 휴가를 나갈 수 있었다.[2] 해병대원들의 신경이 곤두서자 전 대위는 선장과 치안을 맡은 경찰공무원을 만나 해병대원의 승선이 가능하냐고 물었고, 그들은 그렇다고 답했다.
먼저 민간인들이 승선하고 해병대원들이 승선할 계획이었는데, 민간인이 탑승하자 선장은 배를 출항했다. 해병들은 극도로 흥분했는데, 상선이 2km를 나가자 해군 고속정이 부두로 돌아가라고 명령했다. 배가 돌아오자 해병대원들은 배에 올랐다.[3] 해병대원들은 기물을 파손하고 선장 등 상선사관과 선원을 두들겨팼고 경찰도 폭행했다.
해병대원들은 그들이 해병대원을 달갑지 않게 여겨 태우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최선임인 전 대위가 선장을 만나 그들 모두를 탑승시키겠단 약속을 받았고 배는 7시간 뒤에 인천에 도착했다. 항구에는 헌병 인원이 대기하고 있었다. 그들은 해병대원들을 연행했는데, 전 대위가 나와계급과 짬으로 찍어누르며 휴가 나온 장병을 체포하는 건 말이 안 된다며 자신이 대표로 가겠다고 밝혔다.
전 대위는 헌병대 구치소로 잡혀갔고, 한 달 보름 뒤에 휴가나온 군인을 잡아 가두는 것은 너무하다는 동정 여론을 얻어 석방되었다. 이 사건과 해병대 공군비행학교 습격사건 등으로 전도봉은 진급이 불투명했고 장기복무를 보장받지 못했는데, 우여곡절 끝에 중장까지 진급했다.
먼저 민간인들이 승선하고 해병대원들이 승선할 계획이었는데, 민간인이 탑승하자 선장은 배를 출항했다. 해병들은 극도로 흥분했는데, 상선이 2km를 나가자 해군 고속정이 부두로 돌아가라고 명령했다. 배가 돌아오자 해병대원들은 배에 올랐다.[3] 해병대원들은 기물을 파손하고 선장 등 상선사관과 선원을 두들겨팼고 경찰도 폭행했다.
해병대원들은 그들이 해병대원을 달갑지 않게 여겨 태우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최선임인 전 대위가 선장을 만나 그들 모두를 탑승시키겠단 약속을 받았고 배는 7시간 뒤에 인천에 도착했다. 항구에는 헌병 인원이 대기하고 있었다. 그들은 해병대원들을 연행했는데, 전 대위가 나와
전 대위는 헌병대 구치소로 잡혀갔고, 한 달 보름 뒤에 휴가나온 군인을 잡아 가두는 것은 너무하다는 동정 여론을 얻어 석방되었다. 이 사건과 해병대 공군비행학교 습격사건 등으로 전도봉은 진급이 불투명했고 장기복무를 보장받지 못했는데, 우여곡절 끝에 중장까지 진급했다.
[1] 해병대 공군비행학교 습격사건의 그 사람이 맞다. 당시 중대장 보직을 마치고 해군본부로 전출되었는데, 기상 악화로 한 달째 나가지 못한 상태였다.[2] 당시 해병대원들의 휴가는 군 생활 동안 24박 25일을 두 번 찢어서 나갈 수 있었다. 교육 수료 후 특박을 제외하면 첫 휴가와 말년휴가만 있었고, 그나마도 섬이라서 기한이 제한적이었다. 지금은 이와 같은 일을 방지하고자 휴가 출발과 복귀를 인천광역시에 있는 도서 파견대에서 하고 있다. 휴가 하루 전날 배를 타고 인천에 도착한후 하루 자고 다음날 아침에 휴가를 나간 후 인천으로 휴가 복귀하고 다음날 아침에 배를 타고 부대로 가는 방식이다. 도서파견대를 오가는 시간, 날씨등의 이유로 파견대에서 대기하는 기간은 단순 부대이동으로 봐서 휴가기간에 포함시키지 않는다. [3] 휴가자 외에도 휴가자들을 환송하러 나온 해병대 장병들도 따라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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